Robert Schumann: Carnaval, Op. 9

<사육제>는 슈만이 25세 때인 1835년에 완성한 곡으로, 지인들과 가공인물들을 주제로 삼았다. 하지만 실제적인 묘사라기보다는 낭만적인 환상으로 그렸으며, 즐거움이 넘치는 유쾌한 작품이다. 곡을 구성하는 22곡의 성격 소곡들은 모두 쉼 없이 연주된다.

이 곡에는 ‘네 개의 음표에 의한 작은 정경들’(Scènes mignonnes sur quatre notes)이라는 부제가 딸려있다. 그 음표는 A-E♭-C-B로, 이것은 독일어로 풀이하여 A-S-C-H, 즉 ‘아슈’(Asch)를 의미한다. 아슈는 슈만이 한때 사랑했던 에르네스티네(Ernestine)라는 소녀가 살던 보헤미아의 한 마을 이름이었다. 네 음의 주제는 곡 전체에서 산재하여 등장하며, ‘10. 춤추는 글자들’과 ‘11. 키아리나’, ‘13. 에스트렐라’, ‘14. 재회’에서는 As-C-H, 즉 A♭-C-B의 세 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. 이 주제를 잘 기억하고 듣는다면 슈만이 숨겨놓은 그림들을 찾는 흥미로운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.

1곡 ‘서두’(Préambule): 각 곡에 나올 주제들이 소개되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, 무도회의 시작을 알린다. 들뜬 기분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.

2곡 ‘피에로’(Pierrot): 첫째 마디의 왼손 상성부에서 A-S-C-H의 등장이 눈에 띈다. 익살스러운 피에로의 모습이지만 사색적이고 쓸쓸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.

3곡 ‘알르캥’(Arlequin): ‘알르캥’은 16~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성행한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(commedia dell'arte)에 등장하는 광대로서, 앞의 ‘피에로’과 연결되어 즐겁게 춤을 추며 축제 분위기를 만든다. 첫째 마디의 오른손에서 A-S-C-H를 들을 수 있다.

4곡 ‘고상한 왈츠’(Valse noble):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왈츠 리듬이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. 음정의 도약과 음역의 확대로 화려함이 더한다.

5곡 ‘오이제비우스’(Eusebius): 슈만은 자신의 모습을 몽상적이고 소극적인 인물과 명랑하며 열정적인 인물로 이중화하여 바라보았는데, ‘오이제비우스’는 그 전자의 인물에게 붙인 이름이다.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다르게 차분하면서도 감상적이며,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한다.

6곡 ‘플로레스탄’(Florestan): ‘플로레스탄’은 앞에서 설명한 두 인물 중 후자에게 붙인 이름이다. 슈만은 플로레스탄을 앞세워 오이제비우스의 고독을 털어내고 다시 사육제의 분위기에 동참한다.

7곡 ‘코케트’(Coquette): ‘코케트’는 스승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 있었던 여종으로, 슈만은 그녀로 인해 매독에 걸렸었다. 교태를 부리는 경쾌한 리듬으로 플로레스탄을 유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.

8곡 ‘응답’(Replique): 앞 곡에서 코케트의 유혹에 대한 응답이다. 코케트를 연상시키는 빠르고 높은 패시지가 등장하지만, 플로레스탄은 동조하는 듯하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.

‘스핑크스’(Sphinxs): 번호가 없는 이 곡은 간주곡의 성격을 갖고 있다. 하지만 세 마디에 각각 E♭-C-B-A(SCHA)와 A♭-C-B,  A-E♭-C-B를 그려 넣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, 연주하지 않기도 한다.

9곡 ‘나비’(Papillons): 유쾌하면서도 애교가 넘치는 이 곡은 나비의 나는 모습을 화려하게 그리고 있다. 오른손에서 16분음표의 계속되는 리듬을 배경으로 왼손에서 상승하는 반음계 선율이 나비가 가볍게 날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.

10곡 ‘A.S.C.H.-S.C.H.A.: 춤추는 글자들’(Lettres Dansantes): 제목과는 달리, As-C-H의 음형이 사용된다. 왈츠풍의 이 경쾌한 춤곡은 가벼운 스타카토의 선율에 꾸밈음을 넣어 춤추는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.

11곡 ‘키아리나’(Chiarina): ‘키아리나’는 ‘작은 클라라’라는 이탈리어로, 슈만은 스승의 딸이자 연인인 클라라를 키아리나라고 부르곤 했다. 매우 격정적인 이 작품은 As-C-H를 바탕으로 한다.

12곡 ‘쇼팽’(Chopin): 당대의 유명한 음악 동료인 쇼팽에게 경의를 표한 곡으로, 쇼팽의 녹턴을 모델로 하고 있다. 선율은 비교적 단순하지만, 간단하면서도 풍부하게 울리는 왼손 아르페지오가 쇼팽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살린다.

13곡 ‘에스트렐라’(Estrella): ‘작은 별’이라는 뜻으로, 슈만의 옛 연인인 에르네스티네를 가리킨다. 이 곡에서도 As-C-H의 선율이 곡 전체에서 격렬하게 나타난다.

14곡 ‘재회’(Reconnaissance): 축제의 혼잡한 가운데 옛 친구를 만난 반가움을 표현한다. 오른손으로 멜로디와 중간 성부의 반복적인 패턴을 연주하는 고난도의 기교가 요구된다.

15곡 ‘판탈롱과 콜롱비네’(Pantalon et Colombine): 판탈롱과 콜롱비네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로, 이 둘은 모두 어릿광대이다. 박력 있는 스타카토 선율과 서정적인 레가토 선율이 교대로 등장하면서 이 우스꽝스러운 한 쌍의 만남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.